1. 개요[편집]
스핀글라스(spin glass)는 스핀 사이의 결합 상수 의 부호가 무작위로 고정되어 있어, 어떤 스핀 배열도 모든 결합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는 무질서·좌절(frustration) 계이자, 그 결과 자유에너지 지형이 지수적으로 많은 골짜기로 쪼개지는 물질 상태를 가리킨다. 실험적으로는 금에 철을 조금 섞은 AuFe 같은 희석 합금에서 처음 발견됐다 — 자화율이 어떤 온도에서 뾰족한 첨점(cusp)을 보이는데, 정작 중성자 산란으로 들여다보면 강자성체 같은 규칙적 자기 질서가 전혀 없다. 스핀 방향이 유리(glass)처럼 무작위로 “얼어붙은” 것이다.
이징 모형이 “모든 결합이 사이좋게 ” 인 착한 세계라면, 스핀글라스는 여기에 를 무작위로 섞어 넣은 것뿐이다. 이 사소해 보이는 변경 하나로 계는 상전이 이론의 표준 도구가 전부 안 먹히는 괴물이 되고, 바닥상태를 찾는 문제는 NP-난해가 되며, 물리학이 아니라 최적화·신경망·부호이론으로 튀어나간다. 조르조 파리시가 이 문제에서 발견한 구조로 20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1
2. 무질서와 좌절 — 왜 이게 어려운가[편집]
두 가지 개념을 먼저 구분해야 한다.
- 퀜치드(quenched) 무질서: 가 한번 뽑히면 시뮬레이션 내내 고정이다. 스핀만 열적으로 움직인다. 물리량은 각 시료(realization)에서 열평균을 낸 뒤 시료 앙상블에 대해 평균한다. 즉 , 그리고 자유에너지는 다.
- 어닐드(annealed) 무질서: 도 스핀과 함께 요동한다면 로 계산하면 되고, 이건 그냥 자유도가 늘어난 보통 계다. 문제는 실제 합금이 퀜치드라는 것.
를 계산할 수 있는 표준 방법이 없다는 게 스핀글라스의 첫 번째 벽이다. 여기서 나온 꼼수가 복제 트릭(replica trick)이다.
정수 개의 동일한 복제본을 만들어 을 계산한 뒤 으로 해석적 연속을 하는, 수학자가 보면 기절할 조작이다. 놀랍게도 답이 맞는다.
두 번째 벽은 좌절이다. 정사각 격자의 한 플라케트(정사각형 하나) 둘레의 결합 곱
이 음수면 그 플라케트는 좌절되어 있다. 네 결합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스핀 배열이 존재하지 않고, 최소한 하나는 반드시 “손해”를 봐야 한다. 를 반반씩 뽑으면 일 확률이 정확히 이므로, 격자의 절반이 좌절 상태다. 좌절된 플라케트끼리는 자기 마음대로 상쇄되지 않고 계 전체를 가로지르는 도메인 벽으로 이어져서, 바닥상태가 하나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아진다.
3. 에드워즈-앤더슨 모형과 오더 파라미터[편집]
가장 표준적인 모형은 1975년 에드워즈-앤더슨(EA) 모형이다.
최근접 이웃만 결합하되 는 이항 분포나 가우시안 분포에서 독립하게 뽑아 고정한다. 문제는 오더 파라미터다. 자화 는 스핀 방향이 무작위라 저온에서도 0이다. 즉 “얼어붙었는데 자화는 0”인 상태를 잡아낼 지표가 필요하다. 에드워즈와 앤더슨의 답은 제곱을 먼저 하는 것이었다.
각 스핀이 시간 평균해서 특정 방향으로 치우쳐 있으면(=얼어붙었으면) 부호와 무관하게 이다. 고온 상에서는 이라 . 수치적으로는 같은 를 공유하는 두 복제본 를 독립적으로 돌려 겹침(overlap)
의 분포 를 측정하는 게 국룰이다. 의 모양이 뒤에 나올 이야기의 전부다.
차원 의존성은 사악하다. 2차원 EA 모형은 유한 온도 스핀글라스 전이가 없다 — 이다. 3차원에서야 정도의 진짜 전이가 나타난다. 2D에서 밤새 시뮬레이션 돌리고 “전이 온도가 안 잡혀요”라고 하는 건 코드 버그가 아니라 물리다.
4. SK 모형과 복제 대칭 깨짐[편집]
셰링턴-커크패트릭(SK) 모형은 EA의 평균장 판본이다. 모든 스핀 쌍이 결합하되, 세기를 으로 스케일한다.
셰링턴과 커크패트릭은 1975년 복제 트릭에 복제 대칭(모든 복제본 쌍의 겹침이 같은 값 )을 가정해 풀었는데, 에서 엔트로피가 라는 음수로 나왔다. 이산 스핀계에서 음의 엔트로피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가정이 틀렸다는 뜻.
파리시가 1979~80년에 내놓은 해법이 복제 대칭 깨짐(Replica Symmetry Breaking, RSB)이다. 복제본을 하나의 값 로 묶는 대신, 블록 안에 블록이 들어가는 계층 구조로 쪼갠다(무한 단계 RSB). 그 물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저온 상은 하나의 상이 아니라 지수적으로 많은 순수 상(pure state)으로 쪼개져 있다. 각 상은 자유에너지 장벽으로 분리된 골짜기다.
- 서로 다른 골짜기 사이의 겹침 가 여러 값을 갖기 때문에 가 델타 함수 두 개가 아니라 연속적인 지지를 갖는다. 이게 RSB의 실험적/수치적 지문이다.
- 상태들 사이의 거리는 울트라메트릭(ultrametric)이다. 임의의 세 상태 에 대해 가 성립한다. 즉 상태들이 계통수(dendrogram) 형태로 조직돼 있고, 삼각형은 항상 이등변이다.2
이 구조는 오랫동안 “수학이 아니라 마술”로 취급받았지만, 게라의 부등식과 탈라그랑의 2006년 증명으로 SK 모형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확립됐다. 다만 유한 차원 EA 모형이 RSB 그림을 따르는지, 아니면 피셔-휴즈의 드롭릿(droplet) 그림(저온 상이 본질적으로 두 개, 시간 반전 쌍뿐)을 따르는지는 40년째 논쟁 중이다. 유한 크기 효과가 워낙 커서 수치 실험만으로 결판이 안 난다.
5. 거친 지형, 에이징, 그리고 느려짐[편집]
RSB가 말하는 “지수적으로 많은 골짜기”는 시뮬레이션 하는 사람에게는 곧 재앙이다.
- 임계적 느려짐을 넘어선 느려짐: 보통 상전이의 임계 감속은 인 멱법칙이지만, 스핀글라스에서는 장벽 높이가 크기에 따라 자라서 완화 시간이 로 지수적이다. 격자를 두 배 키우면 시간이 두 배가 아니라 지수배로 든다.
- 에이징(aging): 급랭 후 경과 시간 에 따라 응답 함수가 달라진다. 상관 함수가 로 두 시간에 따로 의존하고 시간 병진 불변성이 깨진다. 요동-소산 정리도 위반된다. “언제 담금질했는지”를 계가 기억한다는 뜻이고, 실제 실험에서 기억(memory)·재활(rejuvenation) 효과로 관측된다.
- 그래서 스핀글라스는 담금질 모사와 병렬 템퍼링의 고향이 됐다. 후쿠시마-네모토가 1996년 병렬 템퍼링을 정식화한 동기가 정확히 EA 모형의 저온 표본추출이었다. 골짜기에서 빠져나오려면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수밖에 없다.
6. 계산 문제로서의 스핀글라스[편집]
바라오나가 1982년에 보인 결과가 결정적이다. 3차원 격자(또는 자기장이 있는 평면 격자) 스핀글라스의 바닥상태를 찾는 문제는 NP-난해다. 반대로 자기장 없는 2D 평면 격자는 최소 가중치 완전 매칭으로 다항 시간에 풀린다. 이 경계선 덕분에 스핀글라스는 물리 문제인 동시에 조합 최적화의 표준 벤치마크가 됐다.
- 이징 해밀토니안은 QUBO(quadratic unconstrained binary optimization)와 선형 변환으로 동치라, 여행하는 외판원·그래프 분할·집합 커버 같은 문제를 전부 스핀글라스로 인코딩할 수 있다.
- 그래서 이징 머신(양자 어닐러, 결맞음 이징 머신, 디지털 어닐러) 업계는 성능 주장을 대부분 EA/SK 인스턴스로 한다. 문제는 이 벤치마크가 “쉬운 인스턴스”를 뽑기 쉬워서, 공정한 비교 설계 자체가 연구 주제라는 것.3
- 호프필드 신경망의 에너지 함수가 바로 EA 해밀토니안이고, 기억 용량 한계()는 SK 계열의 복제 계산으로 유도됐다. 압축 센싱·부호이론·최적화 문제의 상전이 분석도 같은 도구를 쓴다. 통계물리가 지역 최적해 이야기를 최적화 커뮤니티보다 먼저 정량화한 셈이다.4
7. 관련 문서[편집]
8. Footnotes[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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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노벨 물리학상은 파리시가 절반, 마나베 슈쿠로와 클라우스 하셀만이 나머지 절반을 나눠 받았다. 수상 사유가 “원자 규모에서 행성 규모까지 물리계의 무질서와 요동의 상호작용”이라, 스핀글라스와 기후 모형이 한 문장에 들어가는 진귀한 광경이 연출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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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메트릭 공간에서는 모든 삼각형이 이등변이다. 익숙한 예가 생물 분류나 파일 경로 — “고양이와 개의 거리”가 “고양이와 참치의 거리”보다 가깝고, 공통 조상까지의 깊이만으로 거리가 결정된다. 저온 스핀글라스의 상태들이 딱 이런 계통수로 조직돼 있다는 게 파리시의 주장이었고, 처음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안 믿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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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위 인스턴스는 의외로 쉬운 편이라, 벤치마크용으로는 위샤트 플랜티드(Wishart planted) 앙상블처럼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는 인스턴스를 쓴다. “우리 하드웨어가 시뮬레이티드 어닐링보다 1억 배 빠릅니다” 류의 발표를 볼 때는 어떤 인스턴스인지부터 확인하는 게 예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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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제 물리를 떠났다. 딥러닝 손실 지형의 안장점 구조를 논할 때 인용되는 논문들의 절반은 SK 모형 계열의 계산이다. 스핀 두 개 사이의 부호 하나가 이렇게 멀리 갈 줄 누가 알았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