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페르미-디랙 분포(Fermi-Dirac distribution)는 파울리 배타원리를 따르는 입자(페르미온)가 열평형에서 에너지 인 단일 양자 상태를 차지할 평균 확률을 주는 분포다.
여기서 는 화학 퍼텐셜, 는 볼츠만 상수다. 맥스웰-볼츠만 분포와 겉모습은 비슷한데 분모에 +1 이 붙어 있고, 이 한 글자가 20세기 고체물리를 통째로 만들었다. 이 항 때문에 는 절대 1을 넘지 못한다 — 한 상태에 전자 하나, 그 이상은 못 넣는다는 배타원리가 확률의 상한으로 번역된 것이다.1
유도는 대정준 앙상블에서 세 줄이면 끝난다. 단일 상태의 점유수는 0 또는 1뿐이므로 그 상태의 대분배함수는 이고, 평균 점유수를 계산하면 위 식이 바로 나온다. 점유수가 0, 1, 2, … 무한대까지 가능한 보손이었다면 등비급수가 되어 분모에 이 붙는 보스-아인슈타인 분포가 나온다. 통계의 갈림길이 딱 여기다.
2. 페르미 준위, 페르미 에너지, 화학 퍼텐셜[편집]
셋을 섞어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짚고 간다.
- 화학 퍼텐셜 : 온도에 의존하는 열역학량. 입자를 하나 더 넣을 때의 자유에너지 변화. 위 식에 들어가는 게 이것이다. 에서 는 온도와 무관하게 정확히 1/2이다.
- 페르미 에너지 : 에서 채워진 가장 높은 준위의 에너지. 온도에 의존하지 않는 물질 고유의 양.
- 페르미 준위: 실무에서는 대개 를 가리키지만, 문헌마다 혼용된다.
극한에서 는 를 경계로 하는 계단 함수가 된다. 유한 온도에서는 계단 모서리가 규모의 폭으로 뭉개지는데, 가 0.9에서 0.1로 떨어지는 데 걸리는 폭이 대략 다. 상온에서 meV이니, 페르미 에너지가 수 eV인 금속에서는 전체의 겨우 1% 안팎만 이 흐릿한 띠에 들어간다. 자유전자 기체에서 의 온도 의존성은
로 아주 완만하다. 그래서 금속을 다룰 때 로 두는 게 보통 허용된다. 반도체에서는 절대 안 된다 — 밴드갭 안에 놓인 는 온도와 도핑에 따라 요란하게 움직인다.
3. 축퇴와 금속 전자 비열[편집]
를 페르미 온도라 부른다. 전형적인 금속에서 는 수만 K 수준이다. 즉 상온은 로, 전자 기체 입장에서는 거의 절대영도다. 이 상태를 축퇴(degenerate)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고전 통계역학의 유명한 참사가 나온다. 등분배 정리를 곧이곧대로 적용하면 전도 전자 하나당 의 비열이 나와야 하고, 그러면 금속의 비열이 부도체보다 압도적으로 커야 한다. 실측은 그렇지 않다. 전자 비열은 예측값의 100분의 1 수준이고, 게다가 온도에 비례한다.
답은 배타원리다. 대부분의 전자는 자기 아래위가 꽉 차 있어서 를 받아도 갈 곳이 없다. 열을 흡수할 수 있는 건 페르미 면 근처 폭 안에 있는 소수뿐이다. 이 논리를 정량화한 것이 소머펠트 전개로, 매끄러운 함수 에 대해
가 성립한다. 이를 내부 에너지에 적용하면 전자 비열은
가 되어 에 선형이며, 상태밀도 에만 의존한다. 자유전자 기체에서 를 넣으면 로, 고전값에 라는 억제 인자가 곱해진 꼴이다. 저온에서 금속 비열을 로 플롯하면 절편 가 전자 기여, 기울기 가 격자(디바이 , 포논 분산 참고) 기여로 깔끔하게 갈린다. 실험적으로 를 재는 표준 수단이 이것이다.2
4. 계산에서의 골칫거리 — 스미어링[편집]
여기부터가 시뮬레이션 하는 사람의 현실이다. 밀도범함수이론 계산에서 전자 밀도는 브릴루앙 영역(BZ) 적분으로 얻는다.
실제로는 몽코스트-팩 격자 같은 유한한 k-점 집합으로 이 적분을 대체한다. 부도체·반도체라면 아무 문제 없다 — 점유수가 모든 k에서 1 아니면 0으로 매끄러우니 k-점 몇 개만 있어도 수렴한다.
금속은 다르다. 페르미 면이 BZ 내부를 가로지르므로, 점유수는 페르미 면을 경계로 1에서 0으로 불연속하게 떨어진다. 불연속 함수를 유한 표본으로 적분하니 수렴이 처참해진다. k-점을 조금만 바꿔도 페르미 면 근처 밴드가 들락날락하며 전체 에너지가 요동치고, SCF 반복이 두 상태 사이를 왕복하며 수렴을 거부한다. 밴드 구조 계산을 처음 돌린 사람이 금속에서 “charge sloshing”으로 좌절하는 전형적 이유다.
처방은 점유수를 일부러 뭉개는 것 — 스미어링(smearing)이다. 폭 짜리 매끄러운 계단 함수로 갈아끼우면 피적분함수가 매끄러워지고 k-점 수렴이 극적으로 빨라진다. 종류는 이렇다.
- 페르미-디랙 스미어링: 물리적으로 정직한 선택. 로 두면 유한 온도 DFT(머민 범함수) 그 자체가 되고, 최소화 대상은 전체 에너지가 아니라 자유에너지 다.
- 가우시안 스미어링: 델타 함수를 가우시안으로 대체. 다루기 쉽지만 가 커질수록 에너지에 편향이 남는다.
- 메토폴리-파울로(MP) 스미어링: 델타 함수를 에르미트 다항식으로 차까지 전개한 것. 오차가 의 고차항으로 밀려나므로 큰 를 써도 결과에 가깝다. 대가로 점유수가 을 벗어나 음수가 되거나 1을 넘을 수 있다.
- 마즈나리-반더빌트 콜드 스미어링: 엔트로피 항이 거의 0이 되도록 설계해 자유에너지와 전체 에너지의 차이를 최소화한다. 를 물리적 온도로 해석할 필요가 없고, 구조 최적화에서 무난하다.
- 테트라헤드론 방법(블뢰흘 보정): 스미어링이 아니라 k-공간을 사면체로 쪼개 선형 보간으로 적분하는 방식. 상태밀도와 전체 에너지 정확도가 좋지만, 코드에 따라 힘·응력 계산에는 권장되지 않는다.
실무 감각으로는, 전체 에너지·구조 최적화에는 MP 또는 콜드 스미어링에 작은 , 정밀한 DOS에는 테트라헤드론, 물리적으로 뜨거운 계에는 페르미-디랙이 대략의 국룰이다. 어느 쪽이든 는 수렴 파라미터이므로 k-점 수와 함께 수렴 시험을 해야 하고, 논문에 값을 안 적으면 재현이 안 된다. VASP, Quantum ESPRESSO 같은 평면파 기저 코드가 죄다 이 옵션을 첫 페이지에 두는 데는 이유가 있다.3
5. 반도체 — 볼츠만 근사와 그것이 깨질 때[편집]
이면 분모의 지수항이 압도적이라 을 무시할 수 있다.
즉 맥스웰-볼츠만 분포로 되돌아간다. 통상 를 기준으로 삼는다. 비축퇴 반도체에서는 페르미 준위가 밴드갭 한가운데 근처에 있으므로 이 조건이 잘 맞고, 그 덕에 캐리어 농도가 라는 예쁜 지수 꼴이 된다. 질량작용의 법칙 도 이 근사 위에 서 있다.
문제는 축퇴 도핑이다. 도핑을 세게 넣어 가 전도대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가 음수가 되고, 볼츠만 근사는 캐리어 농도를 크게 과대평가한다. 이때는 진짜 페르미-디랙 적분 을 써야 한다. MOSFET 소스/드레인, 콘택 영역, 터널 접합, 축퇴 다결정 실리콘 게이트가 전부 이 영역이다.
반도체 소자 시뮬레이션의 주력인 드리프트-확산 모형은 이 근사를 두 군데에서 물고 있다. 첫째, 캐리어 농도-페르미 준위 관계. 둘째, 아인슈타인 관계 인데 이 관계 자체가 볼츠만 통계에서만 성립한다. 축퇴 영역에서는 확산계수가 커지는 방향으로 일반화된 아인슈타인 관계를 써야 하며, TCAD 코드들은 조이스-딕슨 근사식 같은 것으로 의 역함수를 값싸게 평가한다. 여기에 고농도 도핑에서의 밴드갭 축소까지 겹치면, “페르미-디랙을 켜느냐 마느냐”가 문턱전압 예측을 수십 mV 단위로 흔든다.
6. 관련 문서[편집]
- 맥스웰-볼츠만 분포 · 등분배 정리
- 대정준 앙상블 · 정준 앙상블
- 밀도범함수이론 · 콘-샴 방정식 · 교환-상관 범함수
- 밴드 구조 계산 · 상태밀도 · 몽코스트-팩 격자
- 평면파 기저 · VASP · Quantum ESPRESSO
- 반도체 소자 시뮬레이션
- 포논 분산 · 흑체복사
- 양자역학 · 슈뢰딩거 방정식
7. Footnotes[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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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페르미와 디랙이 독립적으로 유도했다. 디랙이 페르미의 선행 논문을 못 보고 쓴 뒤 사과 편지를 보냈다는 일화가 있고, “페르미온”이라는 이름도 디랙이 붙였다. 이름 양보의 미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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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전자 비열 이야기는 드루데 모형이 왜 절반만 맞았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드루데는 비열은 100배 틀렸는데 전기전도도와 비데만-프란츠 비는 얼추 맞혔다. 두 개의 큰 오차가 서로 상쇄된 것으로, 물리학 역사상 가장 운 좋은 우연 중 하나로 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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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어링 폭을 크게 잡으면 SCF가 기적처럼 수렴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 온도의 금속을 계산한 것이다. “수렴 안 되면 시그마를 올려라”는 조언은 절반만 맞는 말이며, 나머지 절반은 “그리고 반드시 시그마 수렴 시험을 다시 해라”다. ↩